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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만세운동

3대 독립운동 중 하나로 순종의 장례일인 6월 10일 학생들이 힘을 모아 시작한 대규모 만세운동

1. 개요

1926년 6월 10일 순종 인산일에 서울에서 중등학교와 전문학교 학생들이 일으킨 독립만세운동.

2. 운동의 준비과정

1926년 4월 25일 융희황제 순종이 창덕궁에서 서거했다. 이후 전국은 애도의 물결로 뒤덮였다. 약 30만 명의 봉도(추모)인파가 서울로 올라왔고, 창덕궁 돈화문 앞에서는 연일 수많은 사람이 엎드려 소리높여 울었다. 각 학교는 휴교하고 상점들은 철시했다.

김태연(김단야, 2005년 독립장)
김태연(김단야, 2005년 독립장)

그런 가운데 순종 인산일을 기하여 3.1운동과 같은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중국 상해에 있던 사회주의자인 김단야와 김찬은 5월 1일 메이데이를 맞아 국내에서 대규모 시위를 전개할 계획을 세우고, 4월 중순 김단야를 중국 안동(현 단둥)에 파견했다. 김단야는 4월 23일부터 29일까지 신의주에 잠입하여 안동 출신 권오설을 만나 메이데이 시위를 논의하던 중 순종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이에 김단야는 권오설에게 순종 인산일 만세시위가 메이데이 시위보다 먼저 필요하다면서 이를 준비할 것을 지시하고, 관련 자금을 제공했다.

당시 사회주의 계열 청년 단체인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를 맡고 있던 권오설은 6.10만세운동 추진을 위해 투쟁지도부를 구성했다. 이에 따라 권오설, 이지탁, 박민영 세 사람으로 구성된 투쟁지도부가 꾸려졌다. 이들은 투쟁방침으로서 1)사회주의, 민족주의, 종교계, 청년계의 인물을 망라하여 ‘대한독립당’을 조직할 것, 2)대한독립당이 주체가 되어 6월 10일을 기해 대규모 시위운동을 전개할 것, 3)시위는 장례행렬이 지나는 연도(도로)에 시위대를 분산 배치했다가 격문과 전단을 살포하면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칠 것 등을 채택했다.

김단야는 상해로 돌아가 김찬과 함께 “복상 통곡하는 민중에 격함”이라는 격문을 작성한 뒤, 최창식이 경영하는 삼일인쇄소에서 5천 매를 인쇄하여 서울로 보냈다. 인쇄물은 5월 28일경 안동(현 단둥)에 도착했고, 삼성운송점에서 다시 서울로 부쳐졌다. 그러나 이 격문은 6월 7일 경성역에서 일제 경찰에 의해 발각되어 압수되고 말았다.

권오설(2005년 독립장)
권오설(2005년 독립장)

한편 서울의 권오설은 고려공산청년회 회원이자 조선노농총동맹 간부였던 박내원에게 자금을 주어 격문의 인쇄를 부탁했다. 천도교 소속이기도 했던 박내원은 천도교청년동맹과 인쇄직공조합의 사람들 가운데 백명천, 양재식, 이용재 등을 동지로 규합하였다. 이들은 소형인쇄기와 종이 등을 구입하여 5월 31일까지 약 5만 매의 격문을 인쇄하여 상자에 넣어 천도교당 안에 숨겨두었다. 이들은 전국 각지의 조선일보 지사, 개벽사 지사, 천도교 교구, 청년단체 등에 격문 발송을 계획했다. 서울 시가지에는 6월 8일 밤부터 배포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6월 4일 다른 사건과 관련하여 위조지폐범을 쫓던 경찰은 이동규라는 사람의 집에서 ‘대한독립당’ 명의의 격문 한 장을 발견했다. 경찰은 이동규가 격문을 안정식으로부터 받았다는 것을 확인했고, 안정식은 권오설로부터 받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어서 격문이 천도교당에 숨겨져 있을 것이라 추정하고 6일 천도교 본당을 급습하여 본당 구내에서 격문을 발견하고 모두 압수했다. 또 경찰은 수사 과정에서 권오설의 은신처를 알아내 7일 권오설을 검거했다. 같은 날 상해에서 온 격문도 경성역에서 발견되어 압수되었다. 경찰은 서울과 지방의 사회단체 사무실과 간부들의 집을 일제히 수색하여 격문이 이미 전달되었는지를 확인했지만, 격문은 아직 전달되지 않은 상태였다.

한편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이병립은 5월 3일 권오설로부터 순종 인산일에 만세운동 계획을 전달받고 협조를 부탁받았다. 학생과학연구회에 주어진 임무는 순종 인산일 당일에 길 위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하고 격문을 살포하는 것이었다. 이병립(연희전문), 이선호(중앙고보), 박두종(청년회관), 박하균(연희전문), 유면희(중앙고보) 등 학생과학연구회 간부진은 권오설과는 별도로 만세운동을 준비하기로 했다. 이들은 명함인쇄기를 빌려 격문 1만 매를 인쇄하였다. 6월 7일 권오설은 체포되었지만 학생과학연구회 측의 준비는 드러나지 않아, 인쇄된 격문은 9일 중앙고보, 중동학교 등의 학생들에게 전달될 수 있었다.

한편 또 다른 학생 그룹인 박용규(중앙고보), 이동환(중앙고보), 김재문(중동학교), 황정환(중동학교) 등은 별도로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이들은 통동에 있던 박용규의 하숙집에서 5월 말까지 격문 5천 매를 인쇄했다. 이들은 6월 8일과 9일 시내 각 학교 우편함에 격문을 넣었으며, 지방의 주요 학교에도 격문을 우편으로 발송했다. 같은 중앙고보에 다니던 이선호와 박용규, 이동환 등은 서로의 계획을 알고, 각자 만세운동을 준비하기로 하였다.

3. 운동의 전개과정

6월 10일 순종 인산일을 앞두고 3.1운동과 같은 대규모 시위가 다시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서울에 동원된 일본 군대는 모두 1만여 명에 달했다. 또 각 지방에서 차출된 경찰도 3천5백 명에 이르렀다. 용산의 조선군사령부는 3.1운동 당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던 종로3가 파고다공원에 아예 임시사령부를 설치하고 상당한 숫자의 군대를 주둔시켰다. 이로써 서울 시내는 사실상 계엄상태가 되었다.

순종의 의장행렬이 청량리를 통과하는 모습ⓒ독립기념관
순종의 의장행렬이 청량리를 통과하는 모습ⓒ독립기념관

10일 인산 행렬은 오전 8시에 창덕궁 돈화문을 출발하여, 오전 9시 30분에 봉결식장인 을지로 4가 옛 훈련원터에 도착하고, 오전 11시 봉결식과 노제를 지내고, 오후 1시에 식장을 출발하여, 동대문과 청량리를 거쳐 장지인 금곡 유릉에 도착하도록 예정되었다.

총독부측은 장례행렬이 지나갈 도로 양측에 약 2만 1천 명의 중등 이상 각급 학교 학생들을 동원하여 늘어서게 하였다. 이에 따라 돈화문에서 을지로4가 사거리까지 도로의 양쪽으로 공사립 고등보통학교생과 전문학교생, 대학생 등 1만 4천 명, 을지로 4가 남북 도로변에 실업학교와 사범학교 등의 7천여 명 학생들이 도열하게 되었다. 학생들의 앞뒤로는 기마경찰과 헌병, 사복경찰이 포위하여 삼엄한 경계와 감시망을 구축했다.

오전 8시 30분경 인산 행렬이 종로4가 단성사 앞을 통과하자 맞은 편 동양루(옛 피카디리 극장 자리) 앞에 도열한 중앙고보 학생들 가운데 이선호가 앞으로 튀어나와 격문을 뿌리며 “조선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이동환, 박용규, 유면희 등이 미리 나누어 받은 격문을 뿌리면서 역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를 부르다 현장에서 붙잡힌 중앙고보생 수는 69명, 후일 추가로 붙잡힌 학생까지 합하면 1백여 명에 이른다.

6.10만세운동을 보도한 동아일보 1926년 6월 11일자 기사ⓒ국사편찬위원회
6.10만세운동을 보도한 동아일보 1926년 6월 11일자 기사ⓒ국사편찬위원회

이어서 인산 행렬이 청계천 4가 관수교를 지나자 이곳에 있던 연희전문의 이병립, 박하균 등도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태극기를 흔들고 격문을 뿌렸다. 연희전문 학생 권오상, 한일청 등 50여 명이 이에 호응했고, 결국 40여 명의 학생이 경찰에 붙잡혔다. 인근에 있던 보성전문 학생 수십 명도 역시 만세를 불렀다. 행렬이 을지로4가 훈련원 부근에 이르렀을 때, 경성사범학교 앞에서 박두종 외 2명의 청년이 격문을 뿌리며 만세를 불렀다. 이들도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오후 1시 인산 행렬이 훈련원을 출발할 즈음, 다시 부근에서 학생들의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오후 1시 10분경 동대문부인병원(현 한양도성박물관) 앞에서 인산 행렬이 지나간 뒤 『시대일보』 배달부 김락환 외 2명이 호각을 불며 만세를 외치고 격문을 뿌렸다. 오후 1시 20분 창신동 채석장 부근에서도 행렬이 지나자마자 경북 군위 출신의 홍종현이 혈서가 쓰인 태극기를 휘두르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오후 1시 45분경 행렬을 기다리던 신설동 고무회사 앞의 군중 가운데에서 학생 1명이 격문 1백여 장을 살포했다. 이어서 2시 30분경 동묘 앞에서 중동학교 김재문, 황정환 등이 격문을 살포하고 만세를 불렀다.

서울에서 일어난 이날의 만세시위에는 5백 내지 6백 명의 학생들이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이날 시위 현장에서 체포된 학생은 210명에 달했다. 그리고 경찰의 진압과 체포과정에서 많은 학생들이 부상을 당했다.

1926년 6월 11일자 동아일보에 보도된 순종 인산일의 모습ⓒ국사편찬위원회
1926년 6월 11일자 동아일보에 보도된 순종 인산일의 모습ⓒ국사편찬위원회

6월 10일 서울의 시위는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이후 배재고보의 문창모 등 기독교 계열의 학생들은 2차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이에 배재고보뿐만 아니라 협성학교, 피어선성경학원, 기독교청년학원(YMCA) 등 여러 학교 학생들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비밀리에 서대문의 피어선성경학원에 모여 격문을 인쇄했다. 그러나 이들의 계획은 경찰에 의해 탐지되었다. 경찰은 6월 16일 오후 2시경 피어선성경학원 기숙사를 습격하여 관련 학생 3명을 검거하고 등사판 2대와 유인물 2천여 장을 압수했다. 이어서 배재고보 문창모, 협성학교 손병석 등 모두 14명을 체포했다. 그러나 당국은 사건을 가급적 축소시키는 방향으로 6.10만세 이후의 사태를 수습한다는 방침 아래 이들에게 모두 기소유예 처분을 내리고 석방했다.

한편 지방에서도 만세시위가 있었다. 전북 고창공립보통학교 6학년생 50여 명은 요배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학교는 이들에게 정학 처분을 내렸다. 그밖에도 수많은 학교에서 순종 서거 이후 망곡과 봉도식이 행해졌고, 이를 가로막는 일본인 교장과 교사들에게 동맹휴학으로 맞서는 등 학생들의 저항이 계속되었다.

4. 총독부의 사건 수습과 재판

이선호 외 10인 판결문(경성지방법원, 1926.11.17.)
이선호 외 10인 판결문(경성지방법원, 1926.11.17.)

6월 10일 서울에서의 시위와 관련하여 조선총독부는 당초 만세를 외친 5백 명 내지 6백 명을 모두 구속할 방침이었으나, 방침을 변경하여 시위를 주동한 학생들 외에는 모두 석방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가급적 6.10만세사건을 축소하여 그 파장을 줄이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73명을 구속했던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은 그 가운데 11명만 기소하고 나머지 62명은 기소유예로 석방하였다.

「국장 전후에 드러난 사건들」(『개벽』 제71호, 1926.7.1.)
「국장 전후에 드러난 사건들」(『개벽』 제71호, 1926.7.1.)

물론 경찰은 이들 외에도 고려공산청년회의 권오설과 박내원 등에 대해서는 따로 수사를 진행하였고, 수사를 진행하던 중에 사회주의자들이 조직한 조선공산당의 존재를 발견했다. 이후 강달영을 비롯한 관련 인물들의 검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6.10만세운동과 관련된 권오설, 박내원, 권오상(일명 권오돈, 연희전문), 한일청(연희전문), 민창식(천도교 인쇄직공동맹) 등은 ‘6월사건’으로 분류하여 따로 기소하였다.

기소된 이들에 대한 재판은 11월 2일부터 시작되었다. 1심 판결은 11월 17일에 있었으며, 학생 11명에게 모두 징역 1년이 선고되었고, 이 가운데 이병립 등 10명에게는 집행유예 5년, 박하균에게는 실형이 선고되었다. 1927년 4월 2일 열린 항소심 판결에서는 학생 10명에게 징역 1년의 실형, 유면희에게는 만세운동의 준비과정에 참여하지 않은 점이 참작되어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이 선고되었다. 대부분 1심의 집행유예가 취소된 것이다.

‘6월사건’의 재판은 따로 진행되었으며, 1928년 2월 권오설은 징역 5년, 박내원은 징역 5년, 권오상은 징역 1년, 한일청은 기소유예, 민창식은 징역 3년을 언도받았다. 권오상은 감옥에서 고문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1928년 5월 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6월 3일 결국 사망했다. 권오설도 금고형을 받고 수감 생활을 하던 중 고문 후유증으로 1930년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다.

5. 운동의 역사적 의의와 교훈

6.10만세운동의 역사적 의의는 크게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첫째, 6.10만세운동은 3.1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아 전국적인 독립만세운동을 추진했다는 점에서 3.1운동을 계승한 독립운동이었다.

둘째, 6.10만세운동은 사회주의 계열과 학생운동 계열이 민족 독립에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계획하였고, 이러한 노력이 일단은 좌절되었으나, 향후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의 협동전선인 신간회 결성의 토대가 되었다.

셋째, 사회주의자들의 운동 준비가 사전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가자 전문학교와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운동을 독자적으로 준비하여 성공시킴으로써, 학생층이 항일운동의 중심으로 부상하였다.

넷째, 6.10만세운동 이후 학생층의 움직임은 더욱 활발해지고 지방으로도 확산되어 독서회운동, 동맹휴학운동 등 학생들의 조직화로 이어졌고, 1929년 전국적인 학생독립운동을 이뤄냈다.

이처럼 6.10만세운동은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하여 이를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연결시켜 주는 교량으로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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